애인 - 01장: 戀愛講座[연애강좌]

1

철학교수 임학준(林學準)선생의 「연애강좌」(戀愛講座) 제 일회 강의가 오후 두 시부터 영문학부 교실에서 열렸을 때, 교실은 입추의 여유도 남기지 않고 꽉 차 있었다.
임학준 교수는 한 달 전, 이 Μ여자 대학교가 환도하면서부터 초빙해 온 강사로서 한 주일에 두 차례씩 철학 강좌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이회에 걸쳐 이처럼 연애에 대한 강좌를 열게된 것은 하나의 과외강의(課外講義)로서 학교 교무과에서 특히 학생들의 교양을 위하여 개강한 것이었다.
더구나 저급반에서 고급반까지 학년의 구별이 없는 이 강좌는 철학과나 문과 학생들 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과, 가사과, 법과, 교육과, 정치외교과 등, 뭇 색다른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교양 강좌이기 때문에 너무 학술적인 딱딱한 강의가 되기보다도 평이한 이야기로서 누구나 얼른 들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념해 달라는 것이 교무과의 특별한 부탁이었다.
과연 교무과의 예상대로 아니, 예상을 훨씬 넘어서 임학준 교수의 연애 강좌는 일대 성황을 이루어 각과 학생들은 자기네들의 수업 시간을 이스케이프하고 임교수의 강의를 들으려고 밀려들었다. 교실은 터져나갈 듯이 배가 불러, 좌우 옆과 맨 뒤에도 배꼭 찾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복도까지 긴 꼬리를 늘이고 있었다.
이렇듯 성황을 이루운 강좌를 일찌기 교무과에서는 본 적이 없다. 무엇 때문이냐? 성실한 인격자로서 학계의 존경을 받아 오는 임학준 교수의 덕망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좀더 절실한 문제 ─ 현재 그들이 당면해 있고 또한 가까운 장래에 있어서 부닥쳐 올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취급한다는 이 연애 강좌가 마치 그 어떤 달콤한 러브시인을 스크리인이 예약하는 것처럼 감미로운 호기심의 대상이 그들에게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란 무엇이냐?! ─』
각자가 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진작 거기에 대한 설명이 요구될 때, 그리 쉽사리 답변할 수 없는 실로 불가사으의한 생명력의 약동과 신비로운 영육(靈肉)의 연소(燃燒)에 대한 해석과 구명 앞에 그들은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다 이십 대에 발을 갓들여 놓은 젊은 생명체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식육도 왕성하지만 그보다 못지 않게 왕성한 욕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연애였다. 사랑이었다. 이성에게 부치는 애정의 프레젠트이며 또한 거기에 상응하는 애정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젊고 발랄한 생명체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처럼 이성의 애정을 꿈꾸고 희구하고 또한 섭취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애정의 섭취가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영양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가볍게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애란 무엇인가? ─ 이성의 애정을 무자각하게 섭취하고, 또한 섭취하려는 태세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절실한 욕망을 성실한 철학 교수 임학준 선생의 강의에서 그들은 구명해 보려는 것이다.
이윽고 교무과장이 임교수를 인도해 가지고 교실로 들어왔다.

2

오십의 고개를 넘어 선 임학준 교수는 반백의 머리에다 키가 후리후리한 점잖은 신사였다. 채림새만 좀더 산뜻했으면 틀림없는 영국의 젠틀맨이다.
안경을 쓴 길음한 얼굴이 절반으나 세인 올백의 머리와 기품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동작이 무겁고 사색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깊은 주름살이 두 개 양미간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오늘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 이회에 걸쳐 임학준 교수의 연애 강좌를 열기로 했읍니다.』
교무과장인 사십 대의 박교수가 단상에 오르자 소개의 말을 시작하였다.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우리 한국은 온갖 봉건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 국가로서 새로운 발족을 하게 되었읍니다. 따라서 개인의 인권과 남녀 평등을 옹호하는 헌법의 제정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하나의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가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감되게 생각하는 바는 그러한 자유 민주주의를 참되게 받아 드릴만한 정신적 토대의 결핍, 다시 말하면 교양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는 방자주의(放恣主義)를 의미하게 되었고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는 서글픈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더우기 근자, 육〃이오 사변을 전후하여 식자들의 눈썹을 모이게 하는 젊은 남녀의 풍기문란은 하나의 중대한 사회 문제로서 다음 세대의 일군이 될 학생 여러분의 장래를 위해서 우려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를 향유하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연애는 물론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의 자유로움과 방자함을 혼동함으로써 대해와같이 양양하고 주옥과 같이 귀중한 여러분의 인생을 스포일하는(좀먹는) 결과를 맺어서는 과연 될 것인가? 매일과 같이 섭취하는 우리의 음식물이 우리의 육체를 기르는데 있어서 어떠한 영양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목하 당면하고 있는 절실한 욕구의 하나인 연애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영위하는 데 어떠한 영양가치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참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고, 하품이 나네요. 우리들은 여학생이 아니랍니다.』
어디선가 극히 명랑한 소리가 한 마디 툭 튀어나왔다.
『하하하하……』
학생들이 모두 뒤를 돌아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것은 확실히 교실 맨 뒤 어느 한 구석에서였다. 자리가 모자라 좌석 맨 뒤에는 학생들이 겹겹이 쌓이듯이 모여서 있었다. 그 겹겹이 쌓인 얼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여학생이 아닌 대학생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교무과장은 그 얼굴을 골라 낼 시간의 여유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분위기에 어울릴 미소 하나를 싱긋이 지어 보이며,
『앞 말이 다소 길어져서 미안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임교수의 강의를 시작하겠읍니다. 임학준 선생은 새삼스레 소개할 필요도 없을만큼 사계의 고명하신 분으로서 학덕이 겸비하신 인격자이시며……』
『인제 그만해 두세요. 애처가로서도 고명하신 선생님인 줄을 잘 알고 있지요.』
『하하하핫……』
『하하하핫……』
이번에는 학생들이 마음을 놓고 웃어댔다.

3

『하하하핫……』
『하하하핫……』
억제할 바가 없는 젊음의 희열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생리가 명령하는 대로 꽃다운 웃음을 폭팔시키고 있을 무렵, 창밖은 초가을이다. 넓은 잔디밭 위에는 오후의 태양이 눈부시게 범람하고 있었다.
교무과장도 한 번 씩하고 웃으며,
『조용들 합시다.』
했다. 그리고는 교실 맨 뒤곁을 다시금 바라보았다.목소리는 아까와 꼭같은 지점에서 들려왔었다. 그러나 겹겹이 쌓인채 캬득 캬득 웃어대고 있는 수많은 얼굴 중에서 어느 것이 농담의 범인 인지는 좀처럼 분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생의 그러한 발언이 근엄한 임학준 교수의 감정을 혹시나 건드리지 않았을까 저허하는 마음으로 교무과장은 힐끗 뒤를 돌아다보면서 임 교수를 향하여 머리를 약간 숙이어 보였다.
그러나 임교수도 웃고 있었다. 교단 한 편 쪽 걸상에 걸터앉아서 팔장을 지긋이 낀 채,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듯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가벼운 답례로써 교무과장을 대했다. 그러한 무언극(無言劇)이 학생들의 젊은 생리를 또다시 자극하였다. 교실은 또 한 차례 웃음의 꽃바다로 변해버렸다.
『여러분은 참으로 잘 웃어서 좋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아도 여러분은 웃는다지요?』
그래서 또 한 바탕 웃음이 폭발하였다.
『아뭏든 좋은 현상입니다. 처음부터 이처럼 분위기가 좋은 것을 보니, 임 교수의 연애 강좌는 확실히 성공하리라고 믿습니다.』
『아예, 교무과장께서 숫제 강좌를 맡으시지요. 시간두 없는 데……』
빨리 내려 가라는 뜻이다. 거기서 웃음의 꽃은 또 피었다.
교무과장은 이 세 번째 발언에서 마침내 범인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 겹겹이 서 있는 맨뒤 줄에서 흰담벼락을 등지듯이 하고 푸르디 푸른 가을 하늘을 표정 없는 얼굴로 무심히 내다보고 섰는 학생 ─ 까만 비로드 리봉을 머리에다 맨 곤색 양복의 학생이었다.
그 학생이 무슨 과 몇학년인지 교무과장은 모른다. 그래서 싱긋이 웃는 얼굴로 그 학생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일제히 쏟아져 갔다.
그러나 까만 리봉의 그 학생은 여전히 푸른 가을하늘과 마주 서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돌리면서 방그레 웃었다. 따라서 학생들도 유쾌히 웃었다.
『퇴장 명령이 세 번이나 내렸읍니다. 그러면 소개의 말은 이만하고 소생은 물러나야만 하겠읍니다.』
학생들의 손벽치는 소리가 유달리 컸다. 그것은 임교수의 등장보다도 교무과장의 퇴장을 환영하는 신호였다.
처음에는 임교수도 그것이 어느 학생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한 번들은 적이 있는 것같은 목소리기에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더듬고 있을 무렵에 소위 「애처가」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임교수는 교무과장보다 한걸음 앞서서 범인을 발견한 셈이다.
임교수는 그 학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어딘가 정열적인 성숙한 시선 앞에 오 십 삼세의 자기의 연령을 망각했던 한 순간이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며 교단앞으로 걸어나왔다.

4

임교수가 교탁 앞으로 나와 서자 떠들석하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늘은 연애와 인생의 관계를 총괄적으로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여러 학자들의 연애론을 소개하고 나의 연애관 비슷한 것을 이야기 해 봄으로서 이 강좌를 마치기로 하겠읍니다.』
임교수의 음성은 그의 동작과 같이 무겁고 그의 시선과 같이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한 남자가, 그리고 한 여자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어떠한 연애를 하였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연애의 이력서를 쓸 수가 있느냐? ─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지닌 인간적 가치를 저울질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귀중한 재료가 되는 동시에 또한 예민한 시금석(試金石)이 아니 될 수 없읍니다. 여러분은 어떻한 연애를 어떻게 하였느냐? ─ 거기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곧 여러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늠렬(凜烈)한 어조였다.
그 순간까지도 일종의 명랑한 유흥 기분이 아직도 꼬리를 물고 있던 교실 안이었다. 그러던 것이 임교수의 기백있는 최초의 한 마디로서 미사를 드리는 성당처럼 교실안은 엄숙해졌다.
과연 교육이란 지식의 산매(散賣)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학생들은 본 것 같았다. 그것이 만일 임학준 교수가 아니고 천박한 다른 젊은 세대에 속하는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던들 도리어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학생들에게 주었을는지 모른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연애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도 꾀할 수 있읍니다만 연애만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간적인 가치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가치 만큼의 연애를 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그런 정도의 연애관밖에 더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러한 연애관은 여러분의 인생관내지 세계관과 중요한 관련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참되고 훌륭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또한 아름답고 참되게 훌륭한 인생을 지낼 수 있을 것이요, 그와 반대로 야비하고 위선적이고 불미로운 연애를 하는 사람은 또한 그 정도의 인생밖에는 차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콤한 러브시인의 스크리인 같은 것을 연상하고 왔던 학생들의 기대는 전연 틀어지고 말았다. 학생들은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연애는 청춘의 심볼입니다. 동시에 인생이 부닥치는 최초의 도장(道場) 입니다. 이 최초의 인생도장을 여러분은 더럽히지 맙시다. 허영심의 만족을 위한 연애, 또는 취미내지 장난을 위한 연애 혹은 시험적인 연애 같은 경박한 연애로서 인생의 스타아트를 그릇치지 맙시다. 연애는 인생을 장난하는 목도시합(木刀試合)이 아니고, 진실로 한 번 빗맞으면 피를 보고 목숨을 건드리는 진검승부(眞劍勝負)인 것입니다.』
교실은 한층 더 조용하고 엄숙해졌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신도에게 가르치는 신부의 모습을 학생들은 임교수에게서 발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려 버리는 명랑한 목소리가 다시금 한가스레 흘러나왔다.
『너무 지나치게 심각하신 것 같아요.』
까만 리봉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여러번째의 지궂은 야유는 임교수를 자극하기 전에 먼저 학생들의 엄숙한 감정을 건드려 버리고 말았다.

5

연애의 달콤한 일면만을 소설적으로 확대하여 환상하고 실천해 오던 학생들은 연애가 지닌 또 다른 한면의 엄숙성을 민감하게 깨닫고 가벼운 몸서리까지를 느끼고있던 순간인만큼 까만 리봉의 잡음이 적지않게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웃는 학생이 몇 있었으나,
『좀 잠자코 있어요!』
하는 소리가 하나 튀어나오자 웃음 소리는 그만 힘 없이 소리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교실 중간쯤에 자리잡은 안경을 쓴 학생이었다. 그바람에 다른 대다수의 학생들도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뒤를 힐끔힐끔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지극히 조용한 발언 하나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다시금 흘러나왔다.
『잡음이 없도록 교무과장께서 실내를 좀 엄숙하게 통솔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그것은 확실히 대다수 학생의 감정을 대표하는 추상 같은 한 마디이기는 하였으나 어조에 모가없고 어감에 가시가 서지 않는 일견 온건한 발언이었다.
발언자는 앞에서 세째 줄, 복도 쪽으로 맨끄트막 걸상에 앉아 있는 비교적 나이를 먹은 학생이었다. 자주 벨베트 치마에 흰 저고리를 그 학생은 입고 있었다.
부드럽고 조용한 모습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예뻐보이기는 하지만 얼굴에 생기가 없다. 통 보지 못하던 학생이다.
그때까지도 들창밖 가을 하늘과 마주 서 있던 까만 리봉이 홱 시선을 돌리며 자주 벨베트 치마를 한 번 쏘아보고 나서 다시금 창밖을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그런 제스츄어가 안경 쓴 학생의 비위를 다시금 건드리었다.
『교무과장은 저 학생을 퇴장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들 합시다!』
그제서야 교무과장은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강의하시는 분에 대하여 적당한 예의를 가춘다는 것은 학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까만 리봉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며,
『미안합니다. ─ 다만 저는 임선생의 강의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 그랬을 뿐이예요. 하나밖에 없는 목숨으로 두 번만 연애를 하다가는 목숨 한 개가 모자랄까 보아서 그랬을뿐이예요.』
『하하하핫……』
『하하하핫……』
이번에는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임교수와 교무과장을 비롯하여 퇴장을 시키라던 안경잡이 까지도 씨무륵하고 웃었다.
그러나 끝끝내 웃지 않는 학생이 한 사람 있었다.
그것은 흰 저고리에 자주 치마를 입은 학생이었다.
『알았읍니다. 그러나 감상이나 질문 같은 것은 나중으로 하고 강의를 계속하겠읍니다.』
교무과장은 걸상에 걸터앉았고 임교수는 다시금 강의를 계속하였다.
한 시간 동안이나 강의를 계속하면서 임교수는 까만 리봉의 한 마디가 머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임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서 그 시간의 강좌를 끝마치었다.
『자연과학자가 연애를 생리학적인 자연현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경지에 안주(安住)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하등동물까지도 능히 할 수 있는 극히 용이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연애가 되고 또한 인생의 일부분으로서의 엄숙성을 지닐려면 그러한 자연 발생적인 생리적 욕구를 인간만이 가진 지성으로서 통솔하는 노력이 요청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쇼오펜하우에르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연애론, 엘렌 케이 여사의 인격주의적인 연애론 등의 출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연애는 청춘의 심볼입니다. 여러분 학생들, 연애를 합시다! 진실하게 아름답게 연애를 합시다! 그리하여 훌륭한 연애의 이력서를 쓰기로 합시다! 』
우뢰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로 오랫동안 그 박수 소리는 교실을 뒤흔들고 있었다.

6

『연애를 합시다! 진실하게 아름답게 연애를 합시다! 그리하여 훌륭한 연애의 이력서를 쓰기로 합시다!』
임교수의 기백있는 이 마지막 한 마디는 학생의 순결 무구(無垢)한 영혼을 뒤흔드는데 충분한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이십 대의 청년이나 삼사십 대의 장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잠고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머리에는 백발을 노경에 발을 들여 놓은 오 십 대의 주인공이며 학덕이 겸비한 근엄한 철학자의 입으로부터 힘차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학생들로 하여금 연애에 대한 인식을 새롭히게 하는데 엄숙한 양식(良識)이 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연애라는 관념에 대하여 두 가지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하나는 연분홍 장미꽃이 있고 칠색의 찬란한 무지개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의 플라토닠한 아름다운 소꿉장난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좀 더 피부적인 감미로운 향기가 있고 포옹이 있고 접순(接唇)이 있는 관능의 세계였다.
그러나 지금 우뢰와도 같은 박수 소리로서 임교수의 퇴장을 장식하는 학생들의 영혼과 육체는 그러한 환상을 어느덧 지양(止揚)해 버리고 진실하고아름답고 엄숙해야만할 연애의 당위성(當爲性) 앞에서 완전히 승화(昇華)되고 있었다.
학생 하나가 울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실내가 엄숙하기를 교무과장에게 조용한 어조로 제안한 흰 저고리에 자주 치마를 입은 학생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같이 그 학생도 처음에는 손벽을 서너 번 치고 있었다. 그러나 손벽을 치던 손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합장을 하며 무릎 위에서 가만히 멎어 버렸다. 눈물을 담뿍 먹음고 있는 긴 눈썹을 들어 퇴장하려는 임 교수를 그 학생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다가 파란 손수건으로 얼른 눈물을 찍어 내며,
『저 선생님 ─』
하고 불렀다. 임교수는 멈칫하고 돌아섰다.
『선생님. 시간이 바쁘시겠지만……한 가지 여쭈워 볼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아, 무엇입니까?』
임교수는 다시금 교탁 앞으로 다가섰다.
학생은 다소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용기를 얻은 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저 선생님 지금, 진실하고 아름답게 연애를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하는것이 진실하고 어떻게 하는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추상적인 말씀이 되어서 잘 알아 들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희들이 좀더 쉽사리 알아 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조는 지극히 부드럽고 온건하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중심점 말의 포인트를 붙잡는데 있어서 이 학생은 확실히 성숙한 데가 있었다.
임교수는 질문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학생은 지금 리이베 슈멜즈(戀愛苦[연애고])에 신음하고 있구나!』
하였다.

7

『자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 ─』
답변의 곤궁을 느끼면서 임교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참으로 좋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구체적인 어떤 연애를 비판할 경우에 임해서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뭐라고 답변하기는 대단히 힘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여러분 학생이 가진 깨끗한 인격만이 그것을 잘 실천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임교수의 답변에 다소 불만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그러나 자주 치마의 그 학생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순간, 어두운 오뇌의 빛이 한 줄기 푸뜩 학생의 이맛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임교수는 놓지지 않고 보았다.
오늘 임교수는 세 사람의 발언자와 직접 대면을 한 셈이다.
까만 리봉의 학생과 안경을 쓴 학생과 그리고 이 자주 치마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 자주 치마의 학생이 제일 어른다운 데가 있어 보였다. 그만한 나이를 먹은 것 같기도 하였다. 적어도 대학 적령기를 한두 살 넘어 선 학생임에 틀림 없었다 무척 부드럽고 고운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심신이다 피로한 것 같은 생기 없는 안색을 그 학생은 갖고 있었다.
『요다음에는 질의 문답 시간을 좀더 여유있게 주셨으면 좋겠읍니다.』
그것은 안경을 쓴 아까 그 학생이었다. 어조도 상당히 딱딱하고 엄격하지만 어딘가 석고상처럼 단련한 차거운 모습의 학생이었다.
임교수는 그제서야 고급반 철학 강의 시간에서 그 학생을 한두 번 본 기억을 새롭히며,
『그렇게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
그리고는 교무과장의 간단한 페강의 말과 함께 임교수는 다시금 떠들썩해진 교실을 나섰다.
교무실로 걸어가면서 임교수는 오늘의 발언자인 세 사람의 학생이 모두 다 하나처럼 연애를 한낱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연애 문제에 직접 당면해 있다는 인상을 불현듯 느꼈다.
자주 치마 학생의 어두운 우수의 모습, 안경쓴 학생의 차거운 오뇌의 얼굴, 연애를 종달새처럼 향락하는 것 같은 까만 리봉의 명랑한 표정 ─
『그러나 잘못하면 저런 학생이 위험한걸!』
임교수의 마음에 중얼거림이 무심중 소리가 되어 입술을 흘러나왔다.
『위험하다고……어느 학생 말입니까?』
나란히 서서 걸어가던 교무과장이 얼굴을 돌리면서,
『까만 리봉 말입니까?』
『아니요, 그 학생은 연애를 재치있게 해 치우겠지요.』
『그럼 안경을 쓴?』
『그 학생도 문제는 없겠지요. 그 학생의 어딘가 무척 차거워 보이는 모습이 가면이 아니라면 필시 자존심과 지성의 표시일 텐데, 자존심은 연애의적이니까.』
『그러니까 연애의 괴로움 속에 오랫동안 파묻혀 있지 않고……』
『그렇지요. 자존심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연애를 포기할 수 있으니까, 결국 위험성은 비교적 적을 테지요.』
『그럼 자주 치마의 학생이……?』
『네, 그 학생은 다소 위험성이 있어요. 진실하게 연애를 실천하려는 강렬한 의욕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와 위험성 사이에 무슨 관련성이 있읍니까?』
상과 교수인 교무과장은 다소 얼떨떨했다. 임교수는 얼마 동안 대답을 않고 있다가,
『있지요. 연애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재치도 없고 또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는 학생 ─ 대단히 위험하지요. 요즈음처럼 눈앞(眼前[안전]) 제일주의의 험악한 세상에서는 있기 힘든 일이지만 또한 그만큼 위험성은 더 많지요. 잘하면 사랑의 순교자가 되지만 열이면 아홉까지 일생을 망칠 테니까요. 그런 학생에게는 내 강의가 다소 지나친 영향을 줄는지 모르지만.』
『맞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젊은 학생들 앞에 나서서 뭐라고 떠들기가 점점 더 무서워집니다.』
그러면서 임교수는 교육자로서의 책임감을 한층 더 절실히 느끼는 것이었다.

애인 - 02장: 自然敎室[자연교실]

애인 - 02장: 自然敎室[자연교실]

1

강좌를 끝마친 학생들이 가벼운 흥분과 함께 교정으로 교문을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버스 정류장을 향하여 열을 지었고 그 중 얼마는 영화관에서 갓나온 직후처럼 넓은 교정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얘 저 솔개도 아마 연애를 하는 거지?』
잔디밭 위에 학생들이 대여섯 명 누워 있었다. 그중 하나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응, 임학준 교수의 강의처럼 아주 점잖은 연애야.』
까만 리봉이 웃지도 않는 얼굴로 대답을 했다.단풍이 들기 시작한 학교 뒷산 위에 솔개 두 마리가 유유히 떠 있었다. 한 놈이 가는데로 다른 놈도 따랐다. 그놈이 돌면 또 따라 돌았다. 그러나 조금도 조급한 데가 없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잉비잉 돌고만 있다.
『점잖아! 저게 암만해두 갓 쓰고 담뱃대 물던 양반들의 연애야.』
까만 리봉이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석란인……』
『응?……』
두 손목을 포개여 베고 반듯이 누워서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이 석란(李石欄)은 까만 비로드 리봉의 보드라운 촉감을 손가락 두 개로 향락하면서 대답을 했다.
『저런 한가스런 연앤 석란이 구미엔 맞지 않을 거야.』
『흐응……맘대루 들 생각하렴.』
그러는데 둘 건너 저편 쪽에 누워 있던 학생 하나가 무엇이 우스운지, 혼자서 깔깔 웃고 있다가,
『춘삼월 눈 녹을 무렵, 고양이들이 연애를 하지 지붕마루에서, 담장 밑에서……뜯구 차구……석란의 구미엔 그런게 맞잖아.』
했다.
『하하하핫……하하하핫』
코라스단의 바라에티를 가지고 높고 낮은 웃음소리리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그 맑고 명랑한 웃음 소리 ─ 그것은 젊은 생명력의 자연적 발효(醱酵)를 의미하는 청춘의 찬미가와도 같았다.
『마음대로들 생각하려므나!』
석란도 같이 따라 웃다가 다시금 새침해 지며,
『그렇지만 너희들, 현대의 연애에는 그러한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도 연애 강의냐?』
『암, 그렇지! 알아 듣지 못하겠음 미스터 사아드나 미스터 마조호에게 물어 봄 되지.』
『어려워 지는구나, 점점 더……. 그게 누구냐? 미군 장교들이냐?』
『아이구, 맙소사! 대학 졸업반이 웃겠다, 웃겠어!』
석란은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며 임교수의 엄숙한 음성을 흉내내는 어조로 무대에 선 배우처럼 내려 엮었다.
『연애는 청춘의 심볼입니다. 학생 여러분, 연애를 합시다! 진실하게 아름답게 연애를 합시다! 그리하여 훌륭한 연애의 이력서를 쓰기로 합시다! 에헴 ─』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또 깔깔 웃어댔다. 웃어대면서,
『이석란 교수, 다음을……다음을 그냥 계속해요!』
『암, 계속해야지. 임교수의 강의를 보충하는 의미로서도 이석란 교수의 강의는 필요할 것이요. 에헴 ─』
그러면서 석란은 발딱 일어났다.
도심지대를 멀리 등진 이 M여대 ─ 높고 낮은 구릉이 평풍인 양 교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금잔디 위에서다.

2

손벽 소리와 함께 석란은 일어서서 임교수처럼 뒷짐을 지고 우뚝 버티고 서며,
『에헴 ─』
하고 목을 뺐다
『기침 소리가 너무 잦소. 빨리 강의를 계속하시요.』
『쉬이, 조용들 합시다. 학생 여러분! 강의 하시는 분에 대하여 적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은 학생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에헴 ─』
『아이구, 하품이 나네요. 우리들은 여학생이 아니랍니다.』
맞장구가 제법이다.
『그렇소. 여학생이 아닌 대학생 여러분!손자(孫子)병법에, 적을 이길려면 적을 알라는 말이 있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애에 승리를 할려면 연애를 알아야만 합니다. 미스터 사아드나 마조호를 미군 장교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학생 여러분!이 두 사람의 미스터로 말하면 실로 물고 뜯기우는 고양이의 연애를 철저히 연구한 작가입니다. 물고뜯기우는 감각의 고통이 어찌 애정의 일종으로서 취급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교실이 너무도 엄숙하기에 여기서는 사양을 하겠읍니다만……』
『석란 선생, 사양 마셔도 괜찮아요. 이 교실은 천의무봉(天衣無縫), 인공적인 가식(假飾)의 담벼락은 두르지 않았어요. 푸른 하늘과 땅 검은 사이에 설치된 자연교실이니까요.』
『학생, 학생의 그 학구적인 태도는 대단히 좋습니다만 시간이 다소 바쁜 탓으로 질의 문답 시간은 후일 나의 사택에서 제공하기로 하겠읍니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석란은 손을 들어 멀리 창공을 가리키며 한층 더 근엄한 어조로,
『학생들, 지나치게 조급한 학구적 태도를 잠시 버리고 시선을 들어 창공을 바라봅시다. 솔개 두 마리는 지금도 일정한 간격을 둔 채 비잉비잉 돌기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 여러분! 저 솔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저 두 마리의 솔개는 지금 임학준 교수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학생 하나가 익살맞게 대답을 하였다.
『그렇소. 학생은 지극히 총명하오. 저 유유한 솔개의 인격을 가지고 조급한 고양이의 연애를 통솔하자는 것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여 마지 않는 임학준 교수의 연애와 인생의 중심 명제(名題)입니다. 에헴 ─ 그러나』
그러는데 학생 하나가 갑자기 교문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야아, 그 차 멋지다! 어느 아가씨를 모시러 온 차야?』
하고 외쳤다. 그바람에 석란도 멈칫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교문에서 백 미터 쯤 떨어진 지점에서 유행형 시보레 오 십 이 년도가 한 대 멎어있었다.
옅은 크리임색의 멋진 고급차였다.
학생들이 거의 흩어진 교문밖을 자주 치마의 학생이 고급차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운전대의 문이 휙 열리며 소프트를 쓴, 이것 역시 멋진 신사 하나가 나타나면서 다가오는 자주 치마를 여왕처럼 모시어 운전석 옆자리에 태우고 자기도 따라 운전석에 올라 탔다.
이윽고 시보레 오 십 이 년도는 그림처럼 미끄러져 갔다.
『호화판이야!』
학생 하나가 선망의 뜻을 표했다.
『미군 장교가 안 나타난 것이 다행이지, 뭐야.』
다른 또 하나가 샘을 냈다.
『무슨 과 학생이지?』
석란은 물었다.

3

『글쎄, 무슨과 학생인지, 우린 어떻게 아니?』
『괜찮던데!』자기를 비방한 발언자의 한 사람이긴 했으나 석란에게도 그런 것이 별반 문제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약간 쑥이야.』
『그런 데두 있기는 하지만……』
그러다가 석란은 그 두틈한 귀여운 얼굴을 홱홱 두어 번 흔들며,
『안되겠는 걸! 나두 이제부턴 모시러 오래야겠어!』
『부럽니?』
『얄밉긴 하지만 약간 부럽지 뭐야.』
『너두 이제부터 모시러 오래겠다면서?』
『물론!』
『자가용 있니?』
『오우케이! 자가용 한 대 못 가지는 남자가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 봐라, 그림처럼 미끄러져가는 저 유선형 고급차를!』
『너무 뽐내지 좀 말아 얘. 그래 네 애인이 도대체 어떤 양반이니?』
『하이야 운전수 ─』
『으아, 하하핫……』
참으로 웃기를 좋아하는 계절의 인생들이다. 대굴대굴 굴면서 그들은 웃었다.
『학생들, 어서 웃으시요. 웃음은 청춘의 심볼입니다. 그대들의 입술에서 웃음이 끊기는 순간 그대들의 청춘은 이미 굿바이요, 아디유요, 아우프뷔다 제헴인 것이요.』
『아, 하하핫……』
『아, 하하핫……』
『어서어서 웃으시요. 웃음은 또한 일종의 소화제인 것입니다. 복부 근육의 동요로 말미암아 밥통의 활동을 자극하지요. 그리하여 그대들의 왕성한 식욕은 한층 더 왕성하여 누렁지, 엿가락, 고구마, 무쪽, 쌀튀김, 옥수수 튀김 등속을 나이어린 동생들과 다투어 가면서 먹어 대는 것입니다.』
『아, 하하핫……그만해라 애, 밸 끊어지겠다!』
그러나 석란은 웃지도 않는 얼굴로 창공을 쳐다보며,
『오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 입을 열어 참되게 대답하라! 그대의 마음과 연 어느 곳에 깃들여 있느뇨?……먼 듯, 가까운 듯 먼 듯……아, 얄밉소 이다. 그대여, 그대의 마음의 비밀이여!』
『멋지다, 석란! 정치외교보다 배우로 출세를 하는 것이 어때?』
『배우는 배가 고파요.』『운전수보다도?』
『운전순 월급 삼만환에다 공짜를 합치면……』
『조사도 착실힌 했다!』
『암, 해야지. 반년만 있음 졸업이 아냐?』
그러는데 안경을 쓴 아까 그 학생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다가 혼자 일어서서 떠들어 대는 석란을 한번 힐끗 바라보면서 교문을 향하여 또박 또박 걸어 나갔다.
『아, 언니!』
석란은 학생을 불렀다.
『정주 언니!』
그러나 정주라고 불리운 그 안경 쓴 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까딱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석란은 마침내 잔디밭에서 나와 정주를 따라 뛰어갔다.
『정주 언니!』
석란은 깡충깡충 따라가서 정주가 들고있는 가방 한 쪽 귀를 살짝 붙들었다.
『왜 그러는 거야?』
채정주(蔡貞舟)의 표정 없는 얼굴이 우뚝 멎으며 돌아섰다. 안경 속에서 눈동자가 차겁게 빛나고 있었으나 그 차거운 밑바닥에는 또 한 줄기 다사로움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석란은 민감하게 그것을 느끼며,
『언니, 우리들은 이대로 영영 헤어져야 해요?』
석란은 그러면서 똑바로 정주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 했어?』
정주도 맞받아 쏘아보며 차디찬 대꾸를 했다.
『그래도 언니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석란은 샐쭉해지며 시선을 발뿌리로 떨어뜨렸다. 구두코로 석란은 조약돌 하나를 요리저리 굴리고 달래면서,
『보구두 못 본 척하구……불러도 대답도 않고……교실에선 퇴장 명령만 내리고……그럼 난 싫어! 이대로 영영 헤어진담 난 정말 슬퍼요!』
조약들을 달래고 있는 자주 칠피 구두 코 위에 눈물이 몇방울 톡톡톡 떨어져 내렸다.
『욕심쟁이! 석란은 욕심이 너무 많구!』
정주의 어조는 그대로 차겁다.
『…………』석란은 대답을 잃고 정주는 다시금 저 갈길을 또박또박 걸어갔다.
석란은 눈물 먹은 얼굴을 들고 교문밖으로 사라지는 채정주의 뒷모습을 머엉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정주의 두 어깨가 석란의 눈에는 한층 더 날카로워 보였다.
석란은 머리를 서너 번 홱홱 흔들며 중얼거렸다.
『메이화즈(하는 수 없지) ─』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다시금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네 교제 언니 아냐? 의과래지?……』
학생 하나가 석란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석란은 대답을 않고 잔디 위에 번뜻 누워 버렸다.
『트러블이야?』
『메이화즈!』
석란은 점점 기울어지는 햇발로 말미암아 어느덧 청자색(靑磁色)으로 변해 버린 높은 하늘을 덤덤히 쳐다보았다.
『퇴장 명령은 약간 심한 데! 누구니? 네 애정을 독차지한 새로운 언니는?……』
『메이화즈!』
지궂게 그 한 마디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옆의 학생 하나가 팔고비로 석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신호를 했다.
『임교수가 나온다 얘.』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든 임학준 교수가 현관을 나서서 층층대를 내려오고 있었다. 교정에는 아직도 이 구석 저 구석에 학생들이 한 무더기씩 뭉쳐 있었다.
『저만 함 스타일도 멋쟁이야.』
『석란이 너 약간 반한 게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그만 둬라 얘. 네 아버지 뻘이나 되는데도……?』
『사랑엔 국경도 없듯이 연령도 없는 거야.』
『너 취미도 그만 함 상당하다 얘.』
『우리 한 번 임교수를 놀려 먹을까?』
『어떻게 놀려 먹니?』
『나 하라는 대로만 함 돼!』
『그래, 그래!』
일동은 손벽을 쳤다.

5

임학준 교수는 안경을 벗어 들고 손수건으로 문지르면서 층층대로 해서 교정으로 내려섰다.
『온다, 온다! 두 손을 베고 가즈런히 누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석란은 일동을 지휘하였다.
『오우케이!』
하라는 대로 여섯 명의 학생이 뒤통수에서 깍지를 끼고 반듯이 누워 말똥말똥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들 절대로 임교수를 바라봄 안된다.』
『예쓰!』
『암만 우스워도 웃어서는 안된다.』
『오올라이트!』
『내가 먼저 선창을 할테니, 너희들은 따라서 일체 복창만 함 되는거야.』
『아야!』
『얘, 그건 부산 내기다이!』
『나인 에스 이스트도 이치!(아냐 독일어다)!』
『부산내기, 서울내기, 다마네기다이!』
『아, 하하핫……』
『쉬이! 컴잉, 컴잉!(온다, 온다) ─』
자기 앞길에 그러한 복병들이 대기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임 학준 교수는 깨끗이 문지른 안경을 도로 쓰면서 근엄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임교수가 무심코 머리를 드니, 일렬 횡대로 된 열 두 개의 구두창이 시야에 뛰어 들어왔다. 그 열 두 개의 구두창은 마치 검열관을 맞이하는 열병식의 군대들 모양, 다가오는 임교수를 향하여,
『경례!』
하는 호령과 함께 일제히 구두코를 숙여 절을 하였다. 임교수는 후다닥 놀랬으나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벙벙한 얼굴로 머리를 숙인 열 두 개의 구두창을 힐끔 바라보면서 걸어 가노라니까,
『바로!』
하는 호령이 또 내리면 구두창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 이어,
『하나, 둘, 셋 넷……하나 ─ 둘 ─ 셋 ─ 넷, 하나, 둘, 셋, 넷……』하는 신호와 함께 열 두 개의 구두창은 고개를 까닥 까닥 숙였다 들었다 했다. 말하자면 열병식의 행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교수는 그러한 장난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동안 하다가 이윽고,
『멎엇!』
하는 호령과 함께 구두창은 일제히 고개를 빳빳이 들어 버렸다.
그래도 임교수는 모르고, 남자 대학에서는 못 보던 장난이라고, 지극히 유쾌하게 생각하며 구두창의 대열 앞을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일동 봉창!』
『넷 ─』
하는 소리가 뒤이어 터져나왔다. 뒤이어,
『학생 여러분!』
『학생 여러분!』
『연애는 인생을 장난하는 목도시합이 아니고……』
『연애는 인생을 장난하는 목도시합이 아니고……』
『진실로 한 번 빗맞으면……』
『진실로 한 번 빗맞으면……』
『피를 보고 목숨을 건드리는 진검승부입니다!』
『피로 보고 목숨을 건드리는 진검승부입니다!』
그제서야 임교수도 우주의 철리(哲理)나 깨달은 듯이 걸음을 후딱 멈추며 희쭉 웃는다.
열 두 개의 구두창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잔디밭 위에 길다랗게 뻗쳐있는 여섯 개의 젊은 육체의 수풀을 하나 하나씩 더듬어 올라가던 임교수의 시선은 마침내 선창자의 얼굴을 발견하고 또 한 번 싱긋이 웃었다.
『까만 리봉의 학생이 아닌가!』

6

임 학준 교수는 지극히 명랑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무슨 모욕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임교수의 년치(年齒)와 인생의 깊이는 그러한 사소한 감정을 뛰어 넘는데 있어서 대단히 수월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이러한 멋진 장난을 창작해 내는 까만 리봉의 천진난만한 예지(叡智)가 무척 귀엽기도 했다.
임교수는 지금도 S종합 대학의 철학과 주임 교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남자 대학생들의 그살풍경한 분위기에 시달리는 몸으로서는 한주일에 한두 번씩 나와 보는 이 청명한 교외의 가을 풍경과 함께 젊은 여성들이 발산하는 발랄하고도 꽃다운 향취는 심신이 다 같이 피로한 임교수의 황혼의 인생을 크리닝하는데 좋은 표백제(漂白劑)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임교수는 걸음을 멈추고 확실히 자기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는, 이 잔디 위의 푸른 인생들의 양심없는 명랑한 야유를 달갑게 받으려는 관용의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짧은 스커어트 밑으로 쭈욱쭈욱 뻗은 열 두 개의 다리가 신은 듯 만 듯, 모두 하나처럼 잠자리의 날개 같은 나이롱 양말 속에서 보드럽고 미끄럽다.
가슴 위에 불룩 불룩, 열 두 개의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유방의 나열 저편에는 시치미를 딱 뗀 여섯 개의 새침한 얼굴이 마네킨 인형모양 말똥말똥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 여러분!』
『학생 여러분!』
선창과 복창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어떻게하면 진실하고 아름다운연애를 할 수 있느냐?』
『어떻게하면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할 수 있느냐?』
『오로지 그것은……』
『오로지 그것은……』
『여러분 학생들의 깨끗한 인격에 달렸읍니다.』
『여러분 학생들의 깨끗한 인격에 달렸읍니다.』
『저 유유히 날고 있는 솔개를 보라!』
『저 유유히 날고 있는 솔개를 보라!』
『그 솔개의 인격을 가지고……』
『그 솔개의 인격을 가지고……』
『고양이의 연애를 통솔합시다.』
『고양이의 연애를 통솔합시다.』
임교수는 자기가 하지 않은 구절이 튀어나오기에 벙글벙글 웃으면서도 한편 귀를 솔깃하게 기우렸다.
『칠십 삼 세의 문호 괴에테는……』
『칠십 삼 세의 문호 괴에테는……』
『십 칠 세의 소녀와 연애를 했읍니다.』
『십 칠 세의 소녀와 연애를 했읍니다.』
『오오, 이 얼마나……』『오오, 이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이뇨!』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이뇨!』
『으와, 하하하핫……』
『으와, 하하하핫……』
그 순간까지 꼼짝도 않고 정지 상태에 들어가 있던 스물 네 개의 팔 다리가 갑자기 요동을 하며, 제마끔 허공을 치고 대지를 찼다. 그리고는 깔깔깔깔 웃어대며 댕굴댕굴 딩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임교수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는 이는 없다. 누구 하나 일어나 앉는 이도 없다. 그거야말로 종횡무진으로 잔디밭 위를 디렵다 딩굴기만 했다. 임교수는 이윽고 발뿌리를 돌려 수풀을 왼 편에 바라보며 교문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나갔다. 임교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소리를 잃은 만면파안(滿面破顔)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교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임교수의 얼굴로부터 후딱 웃음은 사라졌다. 십 칠 세의 소녀와 연애를 했다는 칠십 삼 세의 괴에테를 임학준 교수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차차 떨어져 가기는 하였으나 잔디밭 위의 웃음 소리는 임교수의 고막을 그냥 흔들어 왔다.

애인 - 03장: 人生黃昏[인생 황혼]

애인 - 03장: 人生黃昏[인생 황혼]

1

교문 옆에 코스모스가 한 무더기 만발해 있었다. 문을 나서면서 임 교수는 무심중 손을 뻗쳐 코스모스 한 송이를 꺾어볼 생각이 들었다. 흰 꽃은 자기 머리털 같아서 싫었고 보라나 자주는 지나치게 요염해서 탐탁하지 않다. 그래서 임교수는 연분홍을 골랐다.
날은 아직 저물지는 않았으나 해는 노고산 마루턱을 향하여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기 인생도 마치 이 늙은 시어머니 산으로 터벅터벅 걸어내려가고 있는 기울어진 햇발과도 같다고 임교수는 생각한다.
『멀지 않아 황혼이 온다! 이 들에도……내 인생에도……』
마음속으로 임교수는 그런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황혼이 오기 전에 ……황혼이 채 다가오기 전에……』
남이 들으면 무슨 소린지 알아 듣지 못할 마음의 비밀을 임교수는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씨부려 보았다.그렇다. 오 십 삼 세를 인생의 황혼이라고 부르기는 아직도 싫다. 머리는 비록 반백이 되었으나 젊은이들처럼 마음은 젊다. 옛날 같으면 오 십의 고개를 노경으로 쳤지만 요즈음처럼 주위가 다 화려한 시대에는 십년쯤은 인공적으로라도 젊어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때까지 임교수는 나이보다 젊게 보이려는 것 같은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인격의 의장(擬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여성들이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하는 것을 임교수는 무척 경멸하여 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와 소박성을 카무프라쥬하는 인격의 사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임교수는 인격의 부당이득(不當利得)이라고 멸시하여 왔다.
『없으면 없고 있으면 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다가 죽자!』
이것이 임교수의 인생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철학 위에서 영위되어 온 오십 삼년 동안의 임교수의 생활은 소박과 성실과 겸양과 근엄과 극기(克己)의 도덕률 밑에서 지배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팔 · 일오 육 · 이오 전란으로 말미암아 전 민족의 생활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따라서 일반 대중의 생활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따라서 일반 대중의 생활 신조에 커다란 변모(變貌)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모의 근본적인 원인은 철학의 빈곤에 있는 것이라고 임교수는 생각하였다.
인생의 의미를 구명하여 일반 대중에게 지도 정신을 부여하는 철학 자체가 오늘날에 있어서 빈곤과 혼란을 면치 못하거늘 어찌 국민 대중에게 갈곳을 가리키고 할바를 알려 주어 대중으로 하여금 생활의 귀추를 자각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날 그날을 향락하려는 사치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거리 거리에는 사상적 룸펜이 가득차 버렸다. 대중은 생활의 신조를 잃어버리고 철학자는 철학을 상실하였다.
이리하여 임학준 교수도 자기의 인생 철학을 점점 잃어버리기 시작한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오기 전에……』
임교수는 연분홍 코스모스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서 흙 냄새가 후각에 그윽한 시골길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르퉁퉁한 콩밭을 지나고 청청히 푸른 배추밭을 지나서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저녁 바람을 타고 등뒤 멀리서 학생들의 노래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산골짝 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가고 꽃은 떨어지니……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이 학교의 강좌를 맡으면서 교실이나 또는 울창한 수목 사이에서 임 교수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영국 민요「목동의 노래」였다.
임교수는 명상에서 깨어나 문득 뒤를 돌아다보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잔디밭 위에서 열 두 개의 구두창으로 자기에게 경의를 표해 주던 바로 그 장난꾸러기 일행이었다.

2

임교수는 며칠 전, 철학 강의 시간이 거진 끝날 무렵쯤해서 낯설은 학생 하나에게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그러니까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이란 무언인가요?』
그것이 바로 깜정 리봉의 학생이었다.
그 마치 대들듯이 물어온 물음이 너무 돌연하고 당돌하고 조잡했었기 때문에 임교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자아, 나도 잘 모르겠읍니다. 오늘은 시간도 없으니 다음으로 밀고……』
그러면서 교탁 앞에서 물러 나려는데,
『선생님도 그걸 모르신담 확실히 사고는 사고야요.』
했다. 그래서 학생들도 웃고 임교수도 웃었다. 웃으면서,
『허허, 사고?……사고란 무슨 뜻입니까?』
이 사고라는 어휘가 가진 뜻을 임교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깡패들을 위시해서 젊은이들이나 소년들 사이에 요즈음 급작스레 늘어가는 이 사고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임교수의 생리는 구역질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반문을 했더니 깜정 리본은 한두번 쿡쿡 웃음을 깨물면서,
『그것두 모르신담 정말로 사곤데요!』
했다. 학생들이 또 으와하고 웃었다.
그러나 임교수는 이번에는 웃지를 못했다. 이 깜정 리봉이 배앝은 처음 한 마디에서는 여전히 그 어휘가 지닌 나중의 불량성과 조잡성 때문에 기분을 상했던 임교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같은 말이 같은 입에서 다시금 튀어 나오는 순간, 임교수는 그 「사고」라는 어휘가 가진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깜정 리봉의 그 발랄하고 명랑한 현대적 기질과 일분의 오차(誤差)도 없는 정확한 표현이었던 사실을 임교수는 발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의 창백한 관념을 포기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과 그러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바라 보니, 시대의 감각을 정확하게 섭취하고 있는 깜정 리봉의 그 펄떡펄떡 뛰노는 은어와도 같은 신선한 젊음에서 오십 삼 세의 자기의 연령을 망각하는 황홀한 일순간을 임 교수는 향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주인공인 깜정 리봉이 오늘 다시금 구두창의 경의와 노래의 향연으로서 임교수를 환송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버스가 거의 움직이려는 무렵에 여섯 명의 학생이 우르르 차에 올라 탔다 설 자리는 많았으나 앉을 자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임교수가 어물어물하고 서 있는데,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석란이가 얼른 임교수의 팔 하나를 붙들면서 시골부인네와 남자 대학생이 앉아 있는 틈 사이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틈 사이는 다소의 간격이 있기는 하였지만 누가 보든지 사람 하나 들어 앉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아, 괜찮소.』
하고 임교수가 사양을 하면서 후딱 깜정 리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깜정 리봉의 매서운 시선이 남자 대학생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아, 정말 괜찮소.』
보기가 다소 민망해서 임교수가 또 사양을 하는데, 남자 대학생은 그만 석란의 시선에 질렸는지 훌쩍 일어서 버렸다.
『자아, 선생님, 앉으세요.』
그러면서 석란은 임교수의 상반신을 두 손으로 모시듯이 하여 자리에 앉히었다.
『미안합니다.』
임교수는 남자 대학생에게 머리를 조금 숙여 보였다. 그러나 그 남자 대학생은 대답 대신 석란의 얼굴을 핥는 듯이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미리 일어섰음 감사하다는 말이나 듣지?』
좀 들으라는 듯이 석란은 툭 한 번 내쏘고 나서 임교수와 시선을 맞추며 방긋하고 웃었다.

3

요염에 가까운 깜정 리봉의 웃음이었다. 임교수도 싱긋이 웃었다. 웃으면서 임교수는 자기의 웃음이 상당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으로 저으기 당황해 하였다.
『학생, 무슨 과지요?』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임교수는 무슨 말이든 씨부려야 했다.
『선생님이 들으심 웃으실 거예요.』
『내가 웃는다고요?』
지금까지에 임교수가 알고 있는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었지만 이 학생은 한마디 한 마디의 대화까지도 그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매력이 되어 상대편에서 강렬한 호기심을 던져 주면서 앞으로 앞으로 이끌어 나가는 효과를 조성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겠지만, 선생님 만큼은 웃으실 거예요!』
『무슨 관데요?』
그랬더니 깜정 리봉은 두어 번 혼자서 쿡쿡 웃더니만,
『정치외교과 ─』
하고 대답을 하고는 임교수의 표정의 움직임을 말똥말똥 들여다보다가,
『보세요! 웃으셨죠?』
했다. 과연 임교수는 씨무륵하고 웃었던 것이다.
『계집애들이 치맛바람을 피면서 정치외교는 해서 무얼 하느냐고, 그런 말씀이시죠?』
『음 ─』
하고 임교수는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학생은 대단한 심리학자요.』
했다. 그 말에 석란도 입술을 깨물며,
『후후훗 ─』
하고 웃었다.
동료들도 따라 웃었다. 남자 대학생도 씨익하고 웃으면서 석란의 명랑성에 도리어 호감을 느낀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개지의 언덕 고개를 버스는 넘어 시내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기우러져 가는 햇발이 쏟아지듯이 들창으로 들여 쪼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고 내렸다.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에 멎었을 때, 남자 대학생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라보는 석란의 얼굴에다 눈 하나를 싱긋이 감아 보이며 내렸다. 그래서 석란은 홱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학생은 집이 어디요?』
『명동이예요?』
『아, 명동 다방이 많은……』『선생님, 다방에 잘 나가세요?』
『웬걸요.』
『서재에만 너무 들어앉아 계시지 마시고 좀 나오세요. 그래야 사고란 말씀 알아 들으시잖아요?』
『음 ─』
그러나 임교수의 얼굴은 석란의 그것처럼 명랑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자아, 선생님, 여기서 내리셔야죠, 안국동이시니까.』
버스가 종로 네거리에서 멎었다. 석란은 임교수를 부축하듯이 하면서 두 사람 분의 대금을 치르고 앞장을 서서 차에서 내렸다.
『내가 안국동 사는 줄은 어떻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임교수에게 있어서는 이 깜정 리봉의 학생이 하나의 신비로운 존재가 점점 되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에 관한 일은 제가 죄 다 알고 있는 걸요. 선생님이 성실한 애처가라는 것까지도……』
『허허……』
겸연적게 임교수는 웃으며,
『그런 걸 다 어떻게……?』
『저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저리……저리 가셔서 선생님 차 한잔 드시구 가세요.』
나이 찬 딸이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석란은 임교수의 팔 하나를 붙잡고 네길어름에 있는 꽃집으로 자꾸 끌고 들어갔다.
백화가 만발한 꽃 터널을 애인처럼 팔을 끼고 들어간 맨끄트막에 아담한 다방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4

『학생, 이름이 뭐지요?』
『이 석란……돌석, 난초란 ─ 이름만은 좋죠?』
『오허, 왜 이름만 좋겠소?』
『사람도 괜찮겠어요?』
『오허, 석란양은 참으로 명랑한 표현주의자(表現主義者)요.』
그것이 현대의 젊은 세대들이 지닌 하나의 생활 형식인 것 같아서 임 교수는 마음의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그러니까 명실(名實)이 상부하지 않아서 걱정이예요. 이름은 무척 청조하고 고상하지만……』
『오허, 허 허……』
임교수의 젊은 시절에는 마음속의 표정을 적당히 감추는데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석란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마음속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데서 또한 하나의 명랑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임학준 교수로 하여금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태도에 있어서 하나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임교수는 홍차를 마시고 오랜지쥬우스를 빨았다.
교실이나 교정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하나의 검소한 복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석란은 곤색투우피이스가 이처럼 다방에 턱 마주앉아서 바라보니 사지가 발달할대로 발달한 이석란의 성숙한 육체를 장식하는 하나의 화려한 사교복처럼 임교수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후훗 ─』
임교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쥬우스를 빨던 석란의 입술이 화판인 양 쿡쿡 웃었다.
매혹적인 시선이요 웃음이었다. 임교수의 심장이 호닥닥 놀래며,
『석란양은 참 잘도 웃는군. 뭐가 그리 우습소?』
『선생님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제게는 빤해요. 그럴듯하셨겠어! 후훗……』
『아, 하하핫.』
화려한 기분이 임교수의 혈관 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석란은 확실히 존경과 호의 이상의 것을 자기에게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칠십 삼세의 괴에테와 십 칠 세 소녀의 교제를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라고 찬양하던 석란을 생각할 때, 괴에테보다 이십 년이나 젊은 자신의 연령을 마음속으로 몰래 축복하였다.
『선생님, 요다음 한 번만 저와 만나 주시겠어요. 선생님께 저녁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저녁을……』
임교수는 그 순간,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쓴 고개, 단 고개를 같이 손을 이끌고 넘어 온 삼십 년 동안의 보배로운 아내였다. 그 아내에게는 하늘 아래 땅 위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몸이었다. 그러한 자기가 지금 젊은 여성과 더불어 명일의 만찬을 약속하려는 것이다.
임교수는 일종의 죄악감을 느꼈다. 석란과의약속은 확실히 자기 아내의 권위와 체면과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종의 배신 행위이기 때문이다. 임교수가 이내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요다음 연애 강좌 날, 그러니까 내일 모레 다섯 시에 여기서 선생님을 기다리겠어요. 꼭, 꼭, 꼭이예요. 선생님!』
『아, 그런데……』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석란은 레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찻값을 치르고 나오다가,
『아, 참 선생님, 꽃 좋아하시지요. 아까 코스모스를 한 송이 꺾으시는 걸 봤는데……』
석란은 그러면서 꽃집 주인에게,
『조그맣게 한 다발……국화, 그라디어러스, 다리아, 그리고 코스모스를 적당히……』
그러한 자기의 사소한 행동까지를 죄 감시하고 있는 이석란의, 그 빈틈 없는 배념이 ()시 한 번 임교수의 마음을 쳤다.
『선생님 들구 가시기가 거북하실테니까, 보이지 않게 깨끗한 납지로 좀 싸 주세요.』
『네네 ─』
이윽고 둘이는 꽃집을 나섰다.
『자아, 선생님댁, 서재에 갖다 꽂으세요. 그 곰팡내 나는 철학 서적 옆에 ……』
응부의 여유도 없이 임교수는 꽃다발 하나를 안기워 버렸다.
『그럼 선생님, 안녕히……모레 다섯 시에 꼭요! 네?』
손 하나를 내저으며 석란은 이윽고 인파를 헤치면서 명동쪽으로 감실감실 사라져갔다.

5

임교수는 꽃다발을 안고 해 저문 저녁 거리를 안국동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임교수는 싱글벙글 웃었다. 임교수는 지극히 기쁜 것이다.
결혼 생활 삼십 년 동안에 임교수는 다른 여성들과의 깊은 교제를 손수 피해 왔었다. 비록 교제를 맺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멎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 적당한 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자존심과 체면을 손상케 하지 않는 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십 년 동안의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그로 하여금 애처가라는말을 듣게 하는 동시에 판관이라는 말을 감수케 하였다.
그러나 임교수는 그런 말을 조금도 쑥스럽다거나 또는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또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장 영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여성에 대한 애정의 지속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신의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그것이 임 학준 교수의 실천 철학이었다. 분에 넘침을 안다는 것은 곧 천명을 받음이다. 한 사람의 여성을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을 배반해서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를 갖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임교수는 명확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에 서서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인간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끄럼을 느끼지 않을 심경을 가질 수 있는 인생!』
그것이 임교수의 오직 하나요 최고의 기원이었다.
그러한 임교수의 심경이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육 · 이오 동란을 겪는 동안에 흰 머리털이 부쩍 늘면서부터였다.
과연 임교수의 과거에 인간적인 과오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한 줄기 공허 같은 것이 마음속 한 편 구석에 도사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식구가 단출하여 남처럼 의식주의 단련을 받지 않아도 좋은 평화스런 가정 이건만 어딘가 메꾸어지지 못한 한 구석이 차차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과거 삼십 년 동안에 걸친 성실한 가정 생활에 하나의 반동인 것 같았다. 오랜시일에 걸쳐 긴장했던 정신력이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부터 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임교수는 무슨 조그만 변화 같은 것을 자기 생활에 바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가끔 중얼거려 보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무덤 앞에까지 다달아서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때, 한 번도 인간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기는 하다. 아아, 그러나 쓸쓸한 인생이여!』
그 쓸쓸함이 그 훌륭함보다 앞장을 설 때가 가끔 가다 있다는 사실을 임학준 교수를 위하여 슬픈 일인지 기꺼운 일인지를 알 바가 없다.
철학이여, 대답을 하라! 그리하여 성실한 인격자요! 근엄한 철학자인 임학준 교수로 하여금 갈바를 가르쳐 주라! 그는 지금 한 무더기의 꽃다발을 안고 안국동 네길어름에서 지향을 잃은 어린 양인 양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황혼이 오기 전에……』
임교수는 마음의 비밀을 다시 한 번 소리내어서 중얼거리다가 후() ( )을 닫치고 무서운 얼굴로 자기의 헤실펐던 표정을 감추어 버렸다.

6

임교수의 스무 간짜리 집은 안국동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왼편 골목 어구에 있었다.
폭탄 세레는 면했으나 손을 볼 데가 많은 어수선한 집이다.
『아이머니나! 어쩐 셈이유? 꽃다발을 다 사들고 오시구……』
복순이라는 열 아홉 살짜리 계집애와 저녁상을 보고 있던 임교수 부인이 주방에서 뛰쳐나오며 남편의 손에서 우선 가방부터 받아 들었다.
『결혼 삼십 주년 기념으로 특별히 당신을 위해 사 갖구 왔소.』
『아이구, 황송도 하지! 당신도 이젠 제법 개명을 하셨구려.』
그러면서 부인은 가방을 대청에 던지고 상장을 받는 소학생들처럼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히히히힛……』
주방에서 저녁상을 차려 가지고 나오던 복순이가 하마터면 밥상을 뒤집어엎을 뻔하였다
『오허, 허, 헛……복순이가 웃으워 죽겠답니다요.』
그러나 부인은 정말로 기쁘다. 잔주름이 많이 잡힌 오 십 세의 얼굴이었으나 젊었을 적의 어여뻤던 모습은 그 단정한 얼굴에 그냥 남겨 가지고 있었다. 부인은 납지를 헤쳐 꽃다발을 알맹이로 가슴에 안아 보며,
『아아, 이뻐요, 이 그라디어러스!』
소녀처럼 부인은 기뻐하며,
『결혼식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꽃다발을 이렇게 안구, 그리구 이렇게……』
남은 손 하나로 남편의 팔고비를 끼고 천천히 대청으로 올라가면서,
『딴 ─ 딴딴딴……딴 ─ 딴딴딴……』
웨딩 마아치를 웃음과 함께 부인을 불렀다.
『여보, 애들이 웃소, 웃소!』
그러는데 저녁상을 들여놓고 안방에서 나오던 복순이가 그만 행주치마로 입을 막으면서『해해해햇……』
하고 이번에는 마음을 놓고 마구 웃어댔다.
『저것 보우, 복순이가 이제 대청마루를 대굴대굴 굴참이요.』
『그 앤들 인제 며칠 남았다구……? 틈만 있으면 얼굴에 분만 줘 바르는데……』
『어마, 사모님두!』
정말로 대굴대굴 굴듯이 복순은 부엌으로 뛰쳐 들어갔다.
건넌방에서 임교수가 양복을 한복으로 갈아 입고 있는 동안에 부인은 뜰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아들의 책상머리에서 청자기 화병을 들고 나왔다. 그 화병에도 시들어빠진 그라디어리스가 몇가지 축 늘어져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뽑아 버리고 남편이 가져온 꽃다발을 심었다.
『그렇지만 너무 일찌감치 사 오셨어요. 결혼 기념식날은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는데……』
대청 소탁자 위에다 화병을 갖다 놓면서 부인은 다소의 불평을 말하고 있었다.
『응……?』
세수를 하던 얼굴을 임교수는 조금 들다가 휙 다시 숙여 버리며,
『아, 괜찮을 테지. 그맛 쯤……』
아내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의식을 임교수는 다시 한 번 새롭히고 있었다.
동시에 눈을 지긋이 감고 세수를 하고 있는 임교수의 캄캄한 망막 속에 한떨기 아름답고도 신선한 눈치울 꽃(瞼花[검화])이 요염하게 피어 있었다.
『선생님, 한 번만 더 저와 만나 주세요, 네?……꼭이예요, 꼭!……』
그리고 나불나불 인파 속으로 사라져간 깜정 리봉의 청신하고도 발랄한 모습!
『내 인생에 무슨 커다란 위기 같은 것이 올는지도 모른다!』
대단히 불길하면서도 한편 지극히 감미로운 인생의 위기였다.

애인 - 04장: 離別[이별]도 아름답게